“백제 의자왕은 재위 시 신라를 공격하여 40여개 성을 점령할 만큼 뛰어난 군주였습니다. 우리나라 정복군주로 보면 1등이 의자와, 광개토대왕이 2등, 진흥왕이 3등입니다. 중국 사서에는 의자왕을 ‘해동증자’라 할 만큼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융합고고학과 교수는 11일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열린 국학원 제165회 국민강좌에서 ‘백제의 정신문화와 리더십’을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의자왕의 진면목을 소개했다.

"백제가 패망하여 그 책임이 의자왕에게 돌아갔습니다. 백제가 패망한 원인은 의자왕이 자만한 데 있습니다. 백제는 신라보다 대국이었고, 신라를 압박하여 계속 승리하다 보니 승리에 취해 자만했고,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에 쳐들어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았습니다. 의자왕은 중국 삼국시대 ‘조조’와 함께 역사상 가장 왜곡되었습니다. 이런 점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 국학원 제165회 국민강좌에서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가 '백제의 정신 문화와 리더십'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 교수는 의자왕 때 신라와 싸운 계백(階伯) 장군의 리더십을 소개했다.
"계백 장군은 《여지도서》고적 조에 따르면 ”팔충면에 태어났다고 했는데, 이를 보면 지금의 충남 부여군 충화면 천등리에서 출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열전에 적혀 있는 계백이 이름이고 성(姓)을 알 수 없습니다."

계백은 벼슬이 16관등 가운데 두 번째인 달솔에 이르렀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13만 대병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다. 신라의 김유신은 5만의 병력을 이끌고 탄현(완주군 운주면 삼거리)을 넘어 쳐들어왔다. 계백은 결사대 5000을 거느리고 전선으로 나가게 되었다. 출정하기 전 계백은 처자를 베었다.
“이를 두고 조선 초 성리학자 권근은 ‘무도하고 잔인하다. 먼저 사기를 떨어뜨려 싸우기도 전에 남에게 굴복하게 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에 관해 《표해록》의 저자 최부는 ‘계백은 나라가 반드시 말할 것을 알고서도 그 몸을 아끼지 않았거늘 하물며 그 처자를 아낄 수 있었을 것이며, 임금을 배반하였겠는가’라고 권근을 비판했습니다. 저명한 학자인 순암 안정복도 권근을 비판하면서 ‘장수가 되는 도는 무엇보다도 내 집과 내 몸을 잊은 뒤라야 사졸들의 죽을 겸실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니, 만약 조금이라도 내가 먼저 살고자 하는 마음을 둔다면 군심이 해이해져 각각 제 살 궁리와 처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이것이야 말로 더없이 사기를 저상시키는 것이다. 권씨는 계백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병법도 몰랐다’라고 반박하였습니다."
이 교수는 계백의 행위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며 “이 행위는 가혹하다거나 지나치다는 평을 받을 수 있지만 이는 자신이 평소 견지해온 명예를 중시하는 사생관의 산물로 보아야 합니다. 또 이러한 사생관은 일조일석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연마되어 절체절명의 순간에 광채를 발하게 마련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도자는 희생적인 수법과 무한 책임의식을 지녀야만 그 사회가 활력을 얻고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계백이 5000병력을 결사대화 할 수 있었던 요인은 수범을 보인 살신성인적 희생정신 외에는 달리 보탤 게 없을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계백은 신라 군대에 대적하기 위해 충천한 사기나 일치된 군심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었다. 그 위에 지형지세를 이용한 전략의 수립을 얹었다. 숫적으로 적은 군대를 이용한 군사력의 효용을 극대화한 것이다. 계백은 뛰어난 병법가였다. 그래서 안정복은 계백이 험한 곳에 의지해서 군영을 설치한 것은 지(智)의 표상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교수는 “용기와 지모 어느 한쪽이라도 부족한 장수가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심을 하나로 통일시키는데 만족할 게 아니라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통찰력까지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요란한 구호보다는 국민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되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계백이 신라군과 싸우기 직전 군사들에게 했던 맹세를 소개했다. “계백은 전쟁에 임해서 군사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한편 비장감을 갖도록 해서 불리한 형국이었지만 승리를 유도했습니다. 계백은 허장성세가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맹세를 지켰습니다.” 계백은 전장의 선두에서 작전을 지휘하여 네 번이나 거듭 승리하였다.
계백이 신라의 화장 관창을 생포하였지만 살려주었던 것을 이 교수는 살생유택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그물에 걸려든 치어(稚魚)들을 방생하는 것과 같은 넉넉한 금도(襟度)를 말해주는 듯하다는 것.
“이것은 신라 화랑들의 세속오계와 통하는 일면을 보여주지만, 기실은 계백의 어진 심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핏발이 서는 전장에서 보여준 계백의 너그러운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훈훈한 향기로 남아 감동을 줍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정치적 파트너를 소멸과 타도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작금의 정치인들이 새겨 보아야 할 덕목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이 교수는 “안정복이 ‘삼국시대 충신과 의사가 많았지만 사전(史傳)에 나타난 것만 가지고 말하면 마땅히 계백을 으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고 한 것은 계백에 관한 정당한 평가”라며 “국가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국민의 굳센 의지와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여 위기에 대처하는 지도자의 비상한 능력이 필요하다”며 “희생적 수범을 보여서 국민에게 신뢰를 받는 동시에 용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상을 절감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교수는 결사대 5000가운데는 모두 순국한 것은 아니었다고 소개했다. 계백보다 관등이 높은 좌평 충상을 비롯한 20명은 신라군에 항복하였다. 평소 태도가 수상했던 충상은 뒤에 백제인의 국가회복운동을 진압하는 데도 앞장섰다. 달솔 상영도 항복하여 신라의 7번째 관등인 일길찬에 제수되었다.
이 교수는 “계백은 황산벌에서 피를 뿌리고 죽었지만, 그 전기가 전해진 것을 볼 때 신라인들에게 감동을 주었음을 뜻합니다. 신라인들은 조국을 배신한 상영과 같은 인물보다는 적장이었던 계백을 기렸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계백에 관한 기록은 백제인이 아니라 신라인들이 작성했다. 신라인들은 무엇 때문에 계백의 전기를 지었을까?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용약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습니다. 비록 적국의 장수이기는 했지만 신라 군대를 곤경에 빠뜨렸던 계백의 영웅적인 모습은, 이런 점에서 퍽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교수의 해석이다.

이 교수는 이어 흑치상지(黑齒常之) 장군을 통해 우리가 모르는 백제의 정신문화와 리더십을 소개했다.

국민강좌는 국학원이 주최하고 서울국학원이 주관한다. 제166회 국민강좌는 5월11일 오후 6시30분 서울 시민청에서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