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주 기획-6편] 지구시민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5월 16일부터 21일까지의 일본 일정에는 일본 벤자민학교 학생들이 우리와 함께 동행했다. 한국과 일본을 거쳐 우리는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 일정은 5월 22일에서 24일까지 진행되었다. 상하이 지역에 있는 우리나라의 민족정신인 홍익정신을 지키기 위해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한 역사적 의미가 담긴 거점들을 방문했다. 22일, 오전 8시 30분, 우리는 숙소를 나와서 간사이공항을 향해 갔다. 일본 친구들도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걸음을 함께 했고 우리가 게이트로 나갈 때까지 배웅해주었다. 

 

간사이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 푸동공항에 도착했다. 약 2시간 정도 비행해서 중국 시간으로 오후 2시 30분에 도착했다. 중국 입국심사를 하려던 우리에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같이 가던 친구 중 한 명이 여권을 비행기에 두고 내린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비행기는 이미 정비를 하러 떠났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려면 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모두들 풀 죽어 있는 그 친구에게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고 위로했다. 잘못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기운을 북돋아 주는 친구들을 보며 ‘모두가 함께 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성영재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2시간이 지나고 공항직원이 비행기 안에 있던 여권을 찾아주었다. 덕분에 무사히 입국심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 여권을 잃어버려 모두가 어수선했지만 무사히 중국에 도착했다.

입국 절차를 마치고 공항에서 호텔이 있는 곳까지 지하철을 타고 1시간 정도 이동했다. 길거리를 걸으며 호텔을 찾았지만, 호텔의 위치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줄을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우리에게 중국인들이 무슨 일이냐며 다가왔다. 사정을 설명하니 호텔의 위치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했고 덕분에 무사히 호텔까지 갈 수 있었다. 중국 땅에서 사람들이 그저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는데 어디를 가던 도움을 주는 따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서 

 

5월 23일, 본격적으로 중국일정을 시작한 날이었다. 오전 9시 30분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상하이 사범대학으로 이동했다. 대학교 앞에는 큰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의 한쪽에는 ‘한중 평화의 소녀상’이 있었다. 

 

한중 평화의 소녀상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 회복과 세계평화를 위해 2016년 10월 22일 건립되었다. 2015년 서울 성북구 가로공원에도 한중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되었고, 이곳 소녀상은 최초로 중국 현지에 설치된 것이었다. 위안부는 한국과 중국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상처이기에 소녀상이 한중 합작으로 만들어진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느껴졌다. 

 

소녀상 앞에 서자 가슴이 먹먹했다. 소녀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묵념을 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지구시민리더로서 맹세하게 되었다. 묵념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몇 번이고 소녀상의 눈을 바라보며 손을 잡았고, 안아주었다. 261명의 세월호참사 희생자들도 함께하고 있다는 뜻에서 망토를 둘러주기도 했다. 
 

▲ 상하이 사범대학교 공원에 있는 '한중 평화의 소녀상'에 인사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순례길의 열 번째 거점인 루쉰공원으로 이동했다. 루쉰공원은 ‘훙커우 공원’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과 일본군의 상해사변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의 그 사건은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중국 국민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1930년대 조선인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고 꺼져가던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리는 역할을 했다. 공원 안에는 ‘윤봉길의사생애사적전시관’이 있다.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상해에서의 활동, 각종 유품이 전시되어있다. 

 

전시관에 적혀있는 윤봉길 의사의 글귀가 인상 깊었다.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윤봉길 의사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윤봉길 의사의 정신을 이어받은 지금의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을 이롭게 할 비전이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 한 친구가 전시관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흉상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순례길의 열한 번째 거점이자 마지막 거점인 상해임시정부에 도착했다. 상해임시정부는 붉은 벽돌로 된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 한가운데에 있었다. 길을 걷다가 입구 앞에 걸린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팻말을 보고 우리는 이곳이 임시정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항하고 한반도 내외의 독립운동을 이끌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망명정부이다. 1919년 4월 13일에 이곳에 세워졌으며 독립운동단체 중에서는 8.15광복까지 남아있던 유일한 단체였고 광복 직전까지 국내외 독립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곳이다. 나라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나먼 타국 땅에서 자유로운 조국과 민족정신을 되찾기 위해 헌신하신 독립 운동가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건물 안에는 김구 선생님을 포함한 임시정부의 주요인물들이 소개되어있고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광복 맞을 때까지의 활동이 정리되어 있다. 이분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정신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현재의 우리가 홍익정신을 되새기는 순례길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를 둘러보면서 점차 눈빛이 숙연해졌다. 
 

▲ 우리는 순례길의 마지막 거점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앞에서 '지구시민선언문'을 낭독하며 결의를 다졌다.

뇌교육 기반 대안학교 '벤자민인성영재학교' 중국으로 나가다! 

우리는 거점들을 탐방하고 뇌교육을 기반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대안학교인 벤자민학교 학생으로서 중국에 있는 뇌교육 센터로 갔다. 이곳은 중국 벤자민학교 설립을 준비하는 곳이다. 뇌교육의 목표대로 자신의 가치를 알고, 세상과 부딪치며 성품을 기르고, 가슴 뛰는 꿈을 갖고 세상을 위한 꿈으로 확장시키는 곳이다. 

▲ 중국 뇌교육 센터에서 선생님들은 우리가 오자 따뜻하게 환영하며 맞아주셨다.

옆에서 줄리 선생님의 말을 번역해주신 로마 선생님은 “우리가 개척해 나갈 길이 다음 세대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앞으로의 미래사회에서 기계와 경쟁 하게 될 텐데 세상 밖으로 나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인공지능을 뛰어넘을 자연지능을 키울 것”을 강조했다. 또한, “무엇이든지 잘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무슨 일을 하던 지구를 위해 일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한다”고 말했다. 

(주)유다의 대표이사인 줄리 매오 선생님은 “열정이 가득한 여러분의 에너지를 보고 감동받았다. 중국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싶어 하는데 한국 벤자민학교 학생들이 중국 학생들에게 좋은 모델이 될 것 같다.”며 “나중에 한국 벤자민학교 학생들을 초청했을 때 꼭 좋은 선배 멘토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간담회가 끝나고 우리는 ‘쿵푸’를 하는 펜더 인형을 선물로 받았다. 중국에서 쿵푸는 3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무술’, 두 번째는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하는 것’, 세 번째는 ‘성취하는 것’이다. 줄리 선생님은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해 꼭 이루어내길 바란다.”며 응원해주셨다.
 

▲ 선생님들이 주신 인형을 들고 우리는 제각각의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다음 날, 우리는 상하이에서 자유투어를 했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기도 하고 길거리 시장을 들르기도 하고 버스투어로 상하이의 이색적인 풍경을 돌아보기도 했다. 황포강 너머로 각양각색으로 빛나고 있는 동방명주타워와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을 보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작은 세상 속에서만 살아왔다고 느꼈다. 그리고 순례길을 통해서 배운 깨달음을 가지고 더욱 큰 세상으로 뻗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날밤, 상하이의 야경을 감상하며 순례길 일정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중국에서의 일정까지 마쳤다. 한국에서 시작해 일본을 거쳐 중국까지의 모든 여정이 막을 내렸다. 5월 1일, 다 같이 모여 출발 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자랑스럽게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글/사진. 서재원 학생기자 seojw11111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