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이틀째, 경남 산청의 한 펜션에서 하룻밤 머문 천손문화연구회 답사팀은 아침 6시 금관가야의 마지막왕인 구형왕의 왕릉을 보기 위해 출발했다. 답사버스로 10여 분 거리에 구형왕릉이 있었다.

12월 한겨울의 아침이라 해가 뜨지 않아 캄캄했고, 눈 대신 겨울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어스름이 조금씩 사라지며, 크고 작은 자연석으로 촘촘히 쌓은 7층 피라미드인 구형왕릉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 높이는 11.15m로, 국내에서는 유일한 적석 피라미드이다.

▲ 구형왕릉.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며, 7층 피라미드 적석총으로 되어 있다. <사진=강나리 기자>

완만한 산 비탈의 경사면을 따라 쌓은 왕릉 하단은 매우 넓고 4단부터는 급격히 좁아졌다 맨 위는 둥글다. 전면에서 보면 7층 구조이나 뒷면은 층단이 없다. 전면에서 보면 네 번째 단 중간에는 가로 42cm 세로 47cm 깊이 65cm 정도의 방형 감실監室이 있다.

 무덤 앞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적힌 비석이 서 있고, 주변으로는 입구를 제외하고 마치 에워싸듯 1m 높이의 돌담이 둘러져 있었다. 측면에서 보니, 상단의 둥근 부분이 마치 거북의 머리모양과 같았다.

왕릉을 찬찬히 둘러보고 내려오니, 왼편으로 덕양전이 보였다. 덕양전은 정조 17년인 1793년, 구형왕의 후손들이 사적을 보호하기 위해 지었다. 1930년 지금 위치로 옮겨 최근 중건되었는데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봉안하고 봄과 가을에 추모제를 지낸다고 한다.

구형왕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제2대 거등왕부터 10대 구형왕까지 역대 왕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532년 법흥왕 19년에 마지막 왕인 구해仇亥가 신라에 나라를 바친 뒤, 높은 벼슬을 받고, 본국을 식읍으로 받았다고 적혀있다.

 금관가야는 본래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존속했고, 신라에 통합된 후 구형왕은 그의 본국을 식읍으로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왜 깊은 산골 산청으로 찾아들어 역대 어느 왕도 남기지 않은 7층 적석피라미드의 왕릉을 만든 것일까?

▲ 구형왕릉을 측면에서 보면 가장 상층인 둥근 부분이 마치 거북이 머리를 닮았다. <사진=강나리 기자>

가야지역에서 보통 발굴되는 무덤 양식은 고고학적으로 볼 때 구덩식 돌널무덤과 굴식 돌방무덤이다. 돌널무덤은 땅을 파 돌로 사방 벽을 쌓아 석실을 만들고 판석을 덮고 그 위에 봉토를 높이 올린 형태를 말한다. 돌방무덤은 기본구조가 돌널무덤과 동일하고, 세 벽과 천장을 먼저 만든 후에 시신을 한쪽 벽에 넣고 그 벽을 바깥에서 막는 형태를 말한다. 그런데 구형왕릉은 이러한 가야의 기본적인 묘제와 다르다. 오히려 고구려 장군총의 7층 적석총과 닮았다.

구형왕릉의 형태에 관해 답사팀을 이끈 정경희 교수(국학과)는 단군조선 부여족의 남하라는 측면에서, 한반도 남부와 북방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기념비적 유적이라고 평가했다.

정 교수는 “서기 전부터 이주하던 부여족이 3세기말 본격적으로 남하해 금관가야의 왕계를 이루었다. 정체성이 바로 부여족인 것이다. 대성동 고분에서 발굴된 동복(銅鍑, 화분형태의 솥), 소용돌이형 파형동기, 환두대도 등의 출토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또 하나 확실한 증거가 7층 피라미드이며, 7층 피라미드 적석총 구조의 원형은 홍산문명 전산자轉山子 유적”이라고 했다.

정경희 교수는 무덤이나 제단, 탑의 형태로 3층, 5층, 7층, 9층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했다. 선도문화에서 보면, 무덤을 만드는 목적은 그 무덤에 묻힌 사람의 조천朝天(하늘로 돌아감)이었다. 조천을 하려면 몸의 에너지는 땅으로 돌아가지만, 내면적인 정신 에너지는 가벼워져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데 어떤 단계를 거쳐 올라가게 된다. 여기서 3, 5, 7, 9는 단계를 의미한다.

선도에서 3층은 천‧지‧인 또는 정충‧기장‧신명(精充 氣壯 神明)이라는 3단계의 성장을 의미한다. 5는 한민족의 3원 5행 중 다섯 가지, 기‧화‧수‧토‧천부(氣火水土 天符)를 뜻한다고 한다. 공기와 불, 물, 흙으로 이루어진 현상세계를 거쳐 마지막 생명의 단계인 천부의 세계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7이 상징하는 바는 사람의 에너지 중심으로, 7개로 이루어졌는데 이를 흔히 ‘차크라’ 라고 한다. 사람 속에 있는 에너지 7단계를 거쳐 하늘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구형왕릉은 홍산문명에서 고조선, 고구려, 가야로 이어진 선도 조천문화의 상징

한민족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3층 무덤, 3층 제단, 3층탑이고, 그 다음이 7층이다. 매우 드물게 9층 제단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태백산 천제단이다. 태백산 천제단은 원래 9층 피라미드 형태로 1949년 조사기록에 의하면 석단이 9층을 이루어 ‘구단탑’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선도에서 하늘을 9차원이라 했는데, 형태적으로 잘 표현하지는 않았다. 다만 9층 하늘 계단에 관한 전승은 시베리아 무속에도 많이 남아 있고, 우리나라에도 동명왕의 아홉사다리 궁전(구제궁九梯宮) 전승이 있다.

고조선, 고구려의 무대가 되었던 한반도 북쪽 환인지역이나 집안에서는 7층 피라미드가 많이 발굴된다. 고구려 장군총도 7층이며 요동‧요서지역에도 나타나지만, 한반도 내에서 7층 피라미드가 나온 것은 구형왕릉을 제외하고 없었다. 단군조선 부여족과의 연관성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한반도의 남부 그것도 가야의 왕릉에서 나타난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정 교수는 이를 “홍산문명에서 고조선, 고구려로 이어지는 선도의 조천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 바로 피라미드이다. 구형왕릉은 홍산문화의 전산자 유적, 고구려 장군총 문화와 연속적 흐름 선상에 있다.”고 강조하고 “부여족이 3세기 말 본격적인 남하를 하면서 토착화하고, 부여에서 가져온 문화 정체성을 이어갔다. 나라가 망하고 나서 마지막 구형왕릉에 그 흔적을 남겨 후대에 보여줬다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했다.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천손문화연구회 답사팀이 구형왕릉을 둘러본 후. <사진= 강나리 기자>


조선후기 문신인 홍의영(1750~1815)이 쓴 <왕산심릉기>에는 “이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王山寺記>에 ‘방장산의 동쪽 기슭에 산과 절이 있고, 그 위쪽에 왕대王臺가 있으며, 아래쪽에 왕릉이 있으므로 왕산이라 하며, 능묘를 수호하고 있어 왕산사라 한다. 이 절은 왕산의 수정궁이다. 왕은 가락국의 10대 구형왕인데, 신라에게 멸망하자 이곳으로 와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라고 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원 사료인 왕산사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민간에서 왕릉, 고릉古陵, 신라왕릉 등으로 전승되던 7층 피라미드 적석총을 구형왕릉으로 처음 확인한 것은 1798년 고을의 선비 민경원이었다. 영남지방에 큰 가뭄이 들어 6월 4일 왕릉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갑자기 큰 비가 쏟아져 비를 피해 왕산사로 들어갔다. 그때 왕산사 승려가 100여 년 전 승려 탄영이 지은 <산사기山寺記>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기록에 따르면 가락국 10대 구형왕이 땅 때문에 백성이 다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신라에 나라를 양보하고 식읍을 받았으나, 후에 이곳으로 와서 살다 죽었다. 이에 왕산에 장사를 지내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김유신이 옛날 구형왕이 살던 수정궁에 왕산사를 짓고 명복을 빌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 구형왕릉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새겨져 있다. 2017년 12월 10일 어스름한 새벽에 찍은 모습. <사진= 강나리 기자>


구형왕릉 앞에 세워진 비석의 ‘가락국양왕릉’은 무엇을 뜻할까. 비석 속 ‘양왕讓王은 구형왕의 시호諡號인 셈이다. 시호는 왕이나 사대부가 죽은 후, 그 공덕을 칭송하여 추증하는 호이다. 그의 시호 양讓은 ’사양하다, 양보하다‘라는 뜻이다.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구형왕은 이미 금관가야의 국운은 기울고, 날로 압박해 오는 신라군에 말발굽 아래 죄 없는 백성들을 죽게 할 수 없어 나라를 신라에 양도했다는 전승에 근거하여 시호가 붙여진 것이다.

구형왕은 역사에서 사라진 금관가야의 마지막 길에 자신의 왕릉을 통해 그들이 만주에서 출발해 남하한 고조선 부여족이었다는 정체성을 마지막 길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금관가야의 후예들, 신라귀족의 견제를 뚫고 신라왕실에 진입하다

이후 금관가야 후손들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구형왕은 신라에 투항한 이후 가장 후미진 산청에 은거하다 세상을 떠났으나, 아들들은 신라왕실에 보내 신라의 장군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워 복무하게 했다. <삼국사기>에 구형왕의 셋째 아들로 나온 이가 김무력 장군이고, 손자가 김서현 장군, 그리고 증손이 바로 김유신 장군이다.

투항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이 신라에서 자리 잡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어 있긴 했으나 신라 왕족의 성인 김씨(金氏)와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 불리며, 왕족과 결혼할 만큼 대귀족은 되지 못했다. 신라의 입장에서 가야계 왕족은 정복과 통일과정에서 활용할 대상이지 대등한 동반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 구형왕릉 오른편으로 왕릉을 보호하는 '호릉각護陵閣'이라는 건물이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그러나 영민한 김서현 장군은 진흥왕의 동생을 아버지로 둔 왕족인 만명부인과 혼인했다. 만명부인은 성골에서 진골로 품계가 낮아졌으나, 김서현 장군은 공을 세워 삽량주(지금의 양산)의 도독이 되었다. 원래 양산은 신라 박씨세력이 지배한 지역이었으나 김서현 장군이 자리 잡으면서 금관가야의 김씨인 김해 김씨 세력이 장악했다. 

양산 통도사 일대에는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에 관한 이야기들이 전한다. 그 하나로 양산의 고분군에는 신라 왕릉에 준하는 유물이 발굴되는 큰 고분들이 있는데, 그중 부부총이 바로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야계 왕족의 중앙 진출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견제를 받다가 사라질 운명이었던 가야계 왕족의 운명을 극적으로 개척했다.김서현 장군의 아들 김유신은 고구려 낭비성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명성을 떨쳤으며, 김춘추를 자신의 누이와 혼인시켰다. 김유신이 축국놀이을 빌미로 김춘추와 자신의 누이를 인연맺게 한 사건과 누이가 혼전 임신을 했다고 불에 태운다고 하여 선덕여왕의 허락 하에 김춘추와 혼인시킨 일화는 통상적인 과정으로 신라왕실과 귀족사회에 진입할 수 없었던 가야계의 치열한 투쟁이었다.  이후 김유신은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차기 신라 왕을 정하는 회의에 일원으로서, 유력한 후보인 상대등 알천의 양보를 받아내고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등극할 수 있도록 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문무왕으로 등극해 모계인 가야국의 왕계를 신라 왕실의 종묘에 합사하여 제사를 계속 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이로써 김유신은 신라왕실 내에서 확실한 입지를 다졌고 사후 ‘흠무대왕’이라는 시호를 받아 왕족이 아니면서 왕의 호칭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된다.